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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여행

대만 예스진지 투어의 마지막 코스 “ 지우펀” 완벽 정리

by 대만 가이드 성카카 2020. 4. 19.

대만 예스진지 투어의 마지막 코스 “ 지우펀” 완벽 정리

 
대만 타이베이 여행을
다녀오신 분들 혹은
처음 방문 예정 준비를
하고 계신 분들의
필수 코스인
투어”중
마지막 코스인 「지우펀
총정리 들어갑니다.

밤이 되면 중국식 홍등으로 빛나는
예쁜 거리를 볼 수 있으며

과거 일본의 식민지배 시절 금광 관리자들과
광부들이 이용하던
상가 및 홍등가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지우펀은 아홉 집 밖에 없던
외진 산골 마을이었는데

이때 한 사람이 도시로 내려와
항상 아홉 집 것을 함께 구입해

아홉 개로 나눴다고 해서
구등분이라는 의미의
'九份' 즉 지우펀이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원래 이 곳에 살던 원주민들은

1430년대부터 이 곳에서
금이 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후에도 일본인, 네덜란드 상인들이
이 사실을 재발견해냈으나

청나라 말기인 1890년대까지
이 곳에서 금이 본격적으로
채굴된 적이 없었습니다.

 

1890년(청광서 16년) 

대만 행정 장관 류명전이라는 사람이 

철도 건설하던 중 강바닥에서 금모래를 발견하였고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니 

금맥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후는

"진과스" 편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2020/04/19 - [대만 도시별 여행/신베이] - 대만 예스진지 투어의 세 번째 코스 “진과스” 완벽 정리

 

1989년
“2·28 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 “비정성시(悲情城市)”

이 곳을 배경으로 촬영하게 되면서
지우펀은 다시금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
“양조위”가 주연으로 나오며 대만 영화 최초로

이탈리아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 사자상를 수상하며
잊혔던 지우펀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참고로 

2·28 사건(二二八事件)이라 하면...

1947년 2월 28일부터 같은 해 5월 16일까지
대만 전역에서 일어난 민중봉기 사건입니다

중화민국 정부 관료의 폭압에 맞서
대만의 다수 주민인 본성인(本省人)들이

불만을 표출하며 항쟁을 일으키자

중국 국민당 외성인(外省人)들은
본성인(本省人)을 폭압적으로 학살하였는데

대만에서는 2·28대학살[二二八大屠殺],
2·28혁명, 2·28봉기[二二八起義],
2·28사변 등으로도 부릅니다.

 

1895년 4월 17일,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으로

대만(臺灣)과 펑후 제도(澎湖諸島)는
요동반도(遼東半島)와 함께
일본제국에 할양됩니다.

일제는 대만총독부를 설치하여
51년간 대만을 식민 지배하였고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그 해 10월 17일 국민혁명군이

대만에 상륙함으로써 중화민국은
대만과 펑후 제도를 영토로 회복하였습니다.

 

1945년 10월 25일 대만 주둔 일본군은
중화민국 소속 군민 혁명군에 정식으로 항복하였고

이날부터 대만은 중화민국의 영토로
완전히 복귀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이 집권하던
중화민국 정부는 중국 공산당과의

국공내전(國共內戰)으로 인해
대만에 정예 관료나
군인을 보낼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행정단위인 성(省)을 설치하는

대신 천이(陳儀)를 대만성(臺灣省)의
행정장관 겸 경비 총사령으로 임명해

이 곳을 국민혁명국의
군사점령지역처럼 관리했습니다.

 

대만에 대한 군사통치는
현지 주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기는커녕

일제의 식민통치행태를 답습하는 수준에
불과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50년간
일제의 지배와 수탈을 받던 대만 주민들은

새 중화민국 정부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통치는 본토에서와 다르지 않았고

일제(日帝)의 식민통치 이상으로 가혹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만 사회는 종전부터
대만에 살고 있었던 본성인(本省人)과

1945년 광복 이후 중국 대륙에서
새로 이주해온 외성인(外省人)이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계층 간의
극심한 분열과 대립을 겪게 됩니다.

 

외성인(外省人)에 비해 본성인(本省人)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요직은 장제스(蔣介石)의 외성인들이 차지했고

정부가 본성인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정책을 펴자
주민들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중화민국 정부는 계엄령을 통해
본성인(本省人)을 억압하기만 할 뿐
대만의 민심에는 관심이 없었고

대만을 대륙에서의 전쟁을 위한
일종의 군사기지처럼 취급하였습니다.

1946년 당시 통계에 따르면
최고위직은 모두 외성인들이 차지하였고

천임(薦任) 이상의 중상위직에 임명된 본성인의
수조차 전체의 20%에 미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본성인 들은 외성인의 절반에 불과한 월급을 받았는데

이는 일본의 식민 지배 시대에 본성인이

일본인 월급의 60%를 조금 넘게 받았던 것보다도
더 극심한 차별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식민지 시기 일본인 가옥들을
외성인이 대부분 차지하면서

외성인과 본성인 사이에 거주지역의 구별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국공 내전 막바지에
국민당과 함께 대만으로 옮겨 온
약 60만의 하층계급 군인들이

도심 주변에 거주하게 되면서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이들은 1949년 이후 대만에서
중화민국 정부를 유지시킨
국민당의 절대적 지지기반이 되었습니다.

1949년 미국 국무부에서
나온 《중국백서》에 따르면

"정복자의 지배가 다시 시작되었다"라는 인식이

대만 사회 내부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日帝) 식민통치자들이 빠져나간 관직을

대부분 외성인(外省人) 출신자들이 차지하면서

정치구조의 상부를 외성인들이 독점하고
본성인 들은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지방정치체제에 참여하는
독특한 정치구조가 만들어졌다고 하며

이러한 상황에서 대만의 민심은 날로 흉흉해졌고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팽배하였다고 합니다.

 

1947년 2월 27일 

타이베이(臺北) 시 위엔환(圓環) 빌딩 안의 복도에서

정부의 전매(專賣) 독점품인 담배를 노점에서 팔던

린쟝마이(林江邁)라는 여인이 허가받지 않고

담배 노점을 벌였다는 이유로

담배 주류 공사 요원[緝煙]과 경찰에 의해 단속되고

폭행을 당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탈세를 빌미로 담배 주류 공사의 단속요원이

담배를 팔던 여인을 상대로 총신으로

머리를 때리는 등 심한 구타를 가하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과격한 단속 행태에 항의하면서

충돌이 빚어지게 되며

군중이 모여들자 요원들은

인근 경찰서로 달아났습니다.

 

외성인 경찰이 본성인 시민을 폭행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외성인에 대한 차별로 신음하던

본성인 군중의 규모는 점점 커졌습니다.

이들은 담배 주류 공사 요원들이
도망친 경찰서로 몰려가

해당 요원을 내놓으라고 항의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항의하는 군중에게 발포하였는데

소요사태를 구경하고 있던
학생 한 명(陳文溪; 천원시)이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는데

이를 원환집연사건(圓環緝煙事件)이라고 합니다.

 

다음 날인

1947년 2월 28일

사망 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들이

발포 공무원들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며

대만에 들어와 있던
중화민국 경찰과 군부대 본부를 에워싼 채

시위를 하기 시작했는데

대만 행정장관 겸 경비 총사령 천이(陳儀)는

시민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시위를 빌미로 타이베이시에 임시 계엄을 선포하였고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급기야 경찰서에 난입하며

경찰들을 구타해 경찰관이 사망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천이의 집무처로 밀려든 시위대를 향해

군(軍)이 기관총 소사를 퍼부어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지만

시위는 타이베이 시내 도처에서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 등의 양상으로 확대되었고

분노한 시위대는 방송국을 점거하고

대만 전 주민이 궐기할 것을 외치게 되었고

타이베이에서 일어난 사건은

대만 전역의 본성인을 흥분시키며

대만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2·28 사건”입니다.

 

시위는 점차 격화되어 대만 전역의 본성인 들은

경찰서나 군부대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해
무력시위를 벌였고

3월 5일 자이현에서는 총으로 무장한
본성인 3,000여 명이

군경을 공격해 300여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자이전투(嘉義戰鬥)가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이는 앞으로는 처리위원회를 통해

소요사태를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뒤로는 시위의 무력 진압을 위해 장제스에게

대륙에 있는 국민혁명군의 조속한 증파를 요청하였고

“2·28 사건” 틈타 대만에 있던
지하 공산당원들도 보다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국공내전 중이었음에도 장제스는
폭동이 정부 전복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는 천이의 보고에 따라 

3월 8일 2개 사단과 1개 헌병대 규모의 증원군을

대만에 파견하였고

국민혁명군의 증원군이 도착한
1947년 3월 8일부터 

대만에서는 대대적인 유혈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일 새벽 두 시에 대만 북부에 투입된
국민당 군 21사단은

곧바로 타이베이시에 진입해
시위대 진압을 개시하였고

이로 인해 본성인 사상자가 속출하고

본성인 출신 지식인과 2·28 사건을
수습하고자 모였던

주민대표자들 상당수가 살해, 체포

또는 실종되었고 일부는 도망치게 됩니다.

 

진압은 10여 일간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졌고

본성인(本省人) 약 3만 명이 살해,
실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3월 8일 가오슝(高雄), 3월 11일 지룽(基隆), 

타이난(臺南), 3월 12일 자이(嘉義)등에 진입한

국민당의 경찰과 계엄군은 대만 본성인에 대한

무차별적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는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민들을 향한 사격은 물론

기관총과 대포까지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들이 체포되었을 때는

입, 코, 생식기 등을 잘라내고

몸을 칼로 도륙하는 등 잔혹하게 학살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대규모 살육과 약탈은 3월 17일 

국민당 국방부장 바이충시(白崇禧)가

대만에 도착하여 조율에 나선 후

3월 21일이 되어서야 진정되었는데

진압과정에서의 학살과 약탈로 인해

대만은 섬 전체가 초토화되었고

장제스는 처리위원회 인사들의 체포를 명령하고

위원회의 구성원 상당수를 처형하였고

5월 16일 장제스가 공식적으로

사태 종료를 선언함으로써
“2·28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사건 이후 40년 동안 대만에서
“2·28 사건”은 언급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최대의 금기였습니다.

국공내전에서 패퇴한 중국 국민당은
1949년 12월에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로 옮겨왔으나

이미 내전의 패색이 짙던
1949년 5월 1일 

대만 섬 전체에 걸쳐 총 호구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같은 달 21일에는 계엄령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해 말부터 위험 분자로 간주된
이들이 대거 체포하였고

'대만을 보위하고 대륙(중국 대륙)을 공격한다'
(反攻大陸)는

총 구호 하에서 내전을 반대하거나

국공 평화 회담을 주장하거나

평화 건설과 민생 문제를 개선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이나 언론은 무조건

중국 공산당의 간첩, 파괴 분자,
음모 분자로 간주되었다고 합니다.

 

1949년 5월 21일 대만 전역에 발포된
계엄령은

38년 동안 계속되다가 

1987년 7월 15일이 되어서야

쟝징궈(蔣經國) 총통의 명령으로 해제되었습니다.

 

계엄령이 지속되면서 금기 중의 금기가
되어버린 이 사건은

계엄이 해제된 후 대만 독립운동가 정난롱(鄭南榕)이

1987년 2·28 사건 40주년을 기념해

대만 역사상 최초로 “2·28 사건”을 연구하는

‘2·28평화일촉진회(二二八和平日促進會)’를 결성하며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2·28 사건”은 대만의 독립주의 정당인 

민주진보당에서 지속적으로 공론화했으며

1988년 본성인 출신 국민당원 리덩후이(李登輝)가

총통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습니다.

2·28 사건당시 구속된 경험도 있었던
리덩후이 총통은 

1995년 국가차원에서는
최초로 희생자 가족에게 사과하였으며

이듬해인 1996년 2·28 사건
당일 민중이 최초로 모였던 

타이베이신공원(臺北新公園; 당시의 중산공원)은 

2·28평화기념공원(二二八和平紀念公園)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에는
중화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하였고

아직도 2·28 사건 사망자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1991년 리덩후이 총통의 지시로

이듬해 행정원이 발표한
「2·28 사건 연구 보고」에 따르면

“2·28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의 수는

3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국부(國父)'격인 장제스

직, 간접적으로 연루된 사건이라
논쟁이 끊이질 않고 있는데

실제로 사건 발생 60주년인
2007년에는 장제스가

이 사건의 학살을 지시했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왔기에

대만에서 진보성향이거나
민주진보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장제스를 기념하는 기념관인 

중정기념당을 폐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런 논란으로 인해 대만에서는 

2017년부터 2월 28일마다
중정기념당을 휴관하고 있습니다.

 
2·28 사건”을 알면
“비정성시(悲情城市)” 영화가 이해가 되며
지우펀이 어떤 곳인지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조금 길게
설명드렸습니다.

영화의 전 세계적인 흥행세에 힘입어

영화 속 지우펀의 고풍적인 분위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하였고

이 곳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만의 주요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1990년대
지우펀은 완전히 관광 마을로 탈바꿈하였으며

중국식 찻집, 카페, 기념품 가게 등이 지어졌습니다.

 

한국에서는 드라마 온에어와
꽃보다 할배의 촬영지로 유명해졌고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지로

알려지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지만

정작 미야자키 하야오는
공식적으로 부인하였습니다.

 

인터뷰를 보니 집 주변에 있는
풍경을 배경으로 하였다고 하는데

지우펀의 풍경과 비슷하여
와전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당 작품이 나온
2000년대 초반엔

지우펀이 그다지 해외에서
유명하지도 않았고

애초에 작중 배경의 모티브는

일본식 온천과 료칸이지
중국식 야시장이 아니랍니다.

 

 

 

 

 

 

 

확실이 느낌이 조금 비슷하긴 합니다.

지우펀에 가시게 된다면
아신: 망고젤리,리쯔젤리
수신방: 펑리수
미스티,55번: 누가 크래커
오카리나
등등이 기념품으로
유명하지만
대만의 대표 특산물 중 하나인
차(茶)
괜찮은 선물 중 하나입니다.

그중에서도
대만의 가장 대표적인 차 종류인
아리산 우롱차(阿里山烏龍茶)
폴리페놀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는데
이는 중성 지방 연소에
도움을 주어 다이어트 효과에 탁월하며
항산화 작용으로 인해
피부미용과 노화방지에도 도움이 되고
혈관 개선 작용을 하여
혈액 순환에 많이 도움이 됩니다.

부모님과 친지들에게 선물용으로
값이 많이 비싸지 않아서
많이 구입해가시니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우펀에 온 김에
우롱차 한 번 마셔봐야겠죠?

 

 

 

 

 

 


이렇게 테라스에 앉아 차(茶)
한 잔 마시며
지우펀 야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생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된답니다.

10번 가면 9번은 비가 온다는
지우펀!!!

자주 보여 주진 않지만
저는 자주 지우펀을 찾다 보니
환상적인 노을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사람이 많고 길도 협소하여
지옥 같다고 하여 지옥 펀이라 불리지만
가끔 천국 펀도 보여준답니다.

 

 

 

 

 

 

무지개도 가끔 반겨준답니다.

 

 

 

 

 

 

 

잘못된 정보로 판명이 났지만
그래도 지우펀의 상징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다 보니
가오나시 친구들도
가끔 길거리에 출몰한답니다.

 

 

 

 

 

 

 

끝으로 우리 댕댕이와 냥냥이는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이번 포스팅은
대만 타이베이 여행의 필수코스인
투어”중
마지막 코스인 「지우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대만에 오시면
꼭 한 번 방문해 보시길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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